비즈

사기의 재구성

2017년08월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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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전국민이 알아보는 스타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인기가 떨어져 이제 ‘어디서 봤다’ 수준의 배우인 K씨는 어느날 예전 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안부를 챙긴 매니저는 ‘중국의 대형영화사에서 투자자가 오는데 만나보자’ 라고 제안해 왔다. 마침 시간여유도 좀 있고 최근에 많은 후배배우들이 중국에 진출한다는 말을 듣던 차여서 부담 없이 그러겠노라고 말하고는 약속날짜에 시간을 맞추어 나갔다.


 
약속된 호텔커피숍에는 K씨의 예전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이 되어 객실에서 내려온 사람은 조선족동포였다.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었기에 직접 이 조선족동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이 조선족동포는 중국의 투자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며 K씨의 평소 활약상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곧이어 이어진 얘기는 K씨로서는 입을 벌릴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영화의 제작비로는 최소한 우리 돈으로 180억원 이상을 이미 확보해 놓았으며, 중국에서 흥행이 잘 되는 영화는 하루에 무려 천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으므로 K씨가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중국영화시장의 비약은 눈부시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들여다 봐야 한다



서둘러 비자를 받은 K씨는 매니저와 함께 투자가가 있는 항저우로 향했다. 매니저와 관계가 끊어진지는 오래 되었지만 오랜만에 같이 할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잊혀진 과거의 영광도 생각나서 K씨는 그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항저우공항에 도착하자 서울에서 만났던 조선족동포가 공항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항주차장에는 이미 운전기사가 딸린 큰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최고급호텔에 짐을 푼 K씨는 옷을 갈아입고 호텔 커피숍에서 조선족동포로부터 오늘 저녁에 만날 투자자에 대해 들었다. 중국측 투자자 저우(周)씨는 젊은 나이에 부동산업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며, 어릴적부터 꿈이었던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한국의 영화인들을 존경해서 한국중견배우와 함께 일을 도모하고 싶으니 오늘은 그냥 중국 쪽에서 하는 말을 잘 듣고 돌아가서 자기와 함께 계획을 세우자는 얘기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이동한 식당은 화려했다. 수많은 종업원들이 K씨 일행을 맞았으며 식사를 위해 들어간 방은 제법 큰 아파트 하나를 다 옮겨놓은 듯 했다. 식당 한켠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고, 큰 원탁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K씨로서도 이런 식당은 처음이었다.
 

중국식당의 화려함은 가끔 한국인들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곧이어 시간이 되자 들어온 중국측 투자자 저우씨는 생각보다는 훨씬 젊은 모습이었고 옷은 아주 편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고 식사를 시작한 일행은 곧 영화 얘기에 들어갔고 저우씨는 한국과 중국의 영화합작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K씨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K씨의 마음을 끈 것은 중국측의 저우씨가 자신의 휴대전화 속에 K씨의 사진을 수십장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한국에서조차 젊은 세대는 알아보지도 못하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대접한다는 것에 K씨가 감격했던 것은 더 말한 나위도 없다.
 
일단 한국에서 좋은 시나리오와 배우를 구해 오면 자신들이 중국에서 자금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식사자리를 마친 K씨에게는 항저우 지역 명산이라는 고급차가 선물로 주어졌다.
 
서울에 돌아온 K씨는 바빠졌다. 가장 먼저 재미 있는 시나리오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전화만 한두통 하면 될 줄 알았던 시나리오 수배작업은 2개월 이상 진행되었다. 이곳 저곳 연락을 해 보니 이미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시나리오는 대부분 중국 측의 투자자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 섭외작업도 쉽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오다 가다 말 한마디만 해도 따라오던 후배배우들이 말로는 공손하게 대하면서 움직이지는 않는 것이었다.
 
생각다 못한 K씨는 매니저와 함께 작품의 기초개발을 위한 투자자를 찾아나섰고, 매니저는 어느날 영화계와는 무관하지만 어느 정도의 투자능력을 갖춘 사람을 모셔왔다. 이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투자 받아 회사를 차리고, 사무실을 마련한 다음 그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여 매니저와 함께 시나리오 검토 및 배우 면접과 오디션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사이 처음 다리를 놓았던 조선족동포는 몇 번이나 사무실에 와서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것은 몇 달 후의 일이다. 중국시장에 맞을만한 시나리오를 드디어 구하고, 제법 많은 돈을 들여 중국어로 번역하고 난 다음, 연기력 있는 배우들을 2-3명 섭외해 놓고 중국 측에 연락을 보냈는데 별다른 답이 없는 것이다. 약간 조바심이 난 K씨는 중간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게 전화를 했더니 ‘요즘 저우씨가 유럽 출장 때문에 약간 바쁘다. 조금만 기다려라’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조금 더 기다렸는데 중국 측에서는 도무지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한 K씨는 항저우로 향했고, 이번에는 항저우 현지에 있는 한국유학생을 통역으로 하루 고용했다.
 
저우씨의 명함에 나와 있는 주소로 찾아가자 저우씨 회사의 직원이 웃으면서 맞았는데 사무실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고, 원래 전문비서라고 생각했던 그 직원은 알고 보니 회계업무와 관리업무를 모두 함께 하는 직원이었다.
 
K씨가 직원에게 ‘내가 보낸 자료들을 검토하였는가?’ 라고 하였더니, 직원은 아주 담담하게 ‘아직 검토 중이다’ 라는 대답을 했다. 다시 조바심이 난 K씨가 ‘검토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라고 하니 ‘우리가 이곳 저곳에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라고 했다. 참다못한 K씨의 매니저가 성질 급하게 ‘지난 번에 우리가 시나리오와 배우를 섭외하면 중국 측에서 투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이에 대해서는 ‘좋은 시나리오와 배우가 있으면 언제라도 검토할 수 있다’ 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느낀 K씨가 호텔에 돌아와서 조선족 동포에게 전화를 했더니 조선족 동포는 ‘원래 그런 일은 중간에 있는 사람을 통해야지 직접 맞닥뜨리면 안된다. 중국에서는 일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라는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면서 ‘지금 바쁘니 나중에 통화하자’ 라는 말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국에 돌아온 K씨를 기다리는 사람은 새로 만든 회사의 투자자였다. 이미 매니저로부터 상황을 다 전해들은 투자자는 투자금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미 K씨에게는 이 돈을 반환할 능력이 없었다. 한동안 전화와 방문으로 괴롭히던 투자자는 K씨를 경찰에 사기혐의로 고소하고 인터넷신문들은 K씨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중견배우 K씨 사기혐의로 피소’ 라는 제목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선배배우인 K씨의 말을 믿고 스케줄을 미루고 기다리던 후배배우들도 주위에 K씨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K씨는 중국영화는 커녕 한국영화나 드라마 출연도 어렵게 됐다.
 
K씨를 맞아주고 그의 말을 차분히 다 들어주는 사람은 이제 변호사 밖에 남지 않았다. K씨는 떨어진 자신의 명예는 고사하고 당장 생활비를 걱정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약간의 지엽적인 부분 (예를 들어 중국의 도시와 배우의 이니셜 등)을 제외하고는 실화를 거의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다. 중국이라는 꿈에 사로잡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